좋은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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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iro
좋은 봄날

지난 한 주는 몸과 마음이 축처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한껏 봄기운을 느끼게 하는 부활절이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주 내내 영하 기온까지 내려가고 급기야 눈이 섞인 비가 추절거리며 내리니 마치 시간을 거꾸로 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구역모임에서 나눔을 하기 위하여 펼쳐든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주님이십니다”하고 들뜬 마음으로 외치는 사도 요한의 모습을 읽었지만 부활절이 닷새나 지났음에도 저는 아직도 부활하신 그 분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느낄만한 순간을 떠 올릴 수 없었습니다.   장엄하고 화려한 부활미사와 세례식 그리고 분주했던 저녁식사 이후로 말이지요.
 
토요일 아침나절은 저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가족들이 한국학교에 가서 열공하는 동안 저는 마치 남편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로 보내고 주중 아침의 망중한을 즐기는 전업주부와 같이 저만의 시간을 갖는데 이 때에 가끔 혼자서 동네 주위를 뛰고는 합니다.  자주 택하는 코스인 보스톤 칼리지 쪽으로 가면 그 유명한 보스톤 마라톤의 심장파열고개의 일부를 달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학교 구내에 있는 이냐시오 성당에 들어가 잠시나마 하느님과 짧은 대화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토요일은 바람이 심하기는 했지만 오랫만에 화씨 50도가 넘는 놓칠 수 없는 좋은 날씨였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뛰어볼 요량으로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간 다음 마침내 이냐시오 성당 쪽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려던 때였습니다.  넓지 않은 길을 매우 천천히 건너시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오기에 그 분을 에스코트를 하기 위하여 옆으로 갔습니다.  저는 주황색 운동복을 입고 있어서 차들에 잘 띄었고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인데도 할머니 걸음이워낙 느린지라 멀리서 오던 차들조차 가까이 와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이 96세이며 이 성당에 다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2마일 정도 운동하러 나오셨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가끔 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말씀 드리며 짧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제 마음이 조금씩 밝아짐을 느꼈습니다.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요?  고령의 연세에도 꾸준히 운동하시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같은 신자로서 성당 애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가졌기 때문일까요?  이유는 몰라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빨리 걸으실 수는 없지만 처음 보는 사람의 도움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은 거셌지만 따뜻한 봄기운마냥 다가온 할머니께, 그렇게 할머니를 제 앞에 보내주신 분께 저절로 감사의 기운이 올라왔습니다.
 
화사한 봄과 함께 결혼식 시즌이 시작되어 이냐시오 성당에서도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예전처럼 이 성당 만의 독특한 성수대에서 성수를 찍고 잠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올갠과 트럼펫 연주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트럼펫 소리를 들으니 오늘 아침 잔소리로 기를 죽였던 큰 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나중에 이렇게 트럼펫을 불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텐데…꼭 잘하지는 않아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아이에게서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일지도 모르는데…이렇게 머뭇 거리던 사이에 어느새 결혼식이 시작되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남의 귀한 결혼식 촬영에 반바지 운동복 차림의 불청객이 방해될까봐 한쪽 구석으로 몸을 비켰습니다.  그리고 기쁜 모습으로 하나 둘씩 입장하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님, 친구들과 친지들, 반지를 들고 오는 꼬마들, 마침내 신랑과 신부를 보았습니다.  누군가 하느님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해 보라면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는 모습, 진심으로 축복과 행복을 빌어주는 하객들, 환희와 감사에 흠뻑 젖은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가족들이 바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너무도 눈이 부셨습니다.  그리고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다가 다른 길을 건너시는 아까 그 할머니를 다시 만났습니다.  길을 건너고 헤어질 때에는 옛친구처럼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언젠가 이 분을 또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고 기도 안에서 기억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좋은 봄날을 저의 부활선물로 마련해두셨던 모양입니다.
 
 

사진 첨부: